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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테레즈 라캥/박찬욱 영화 박쥐/엘리자베스 올슨 영화] 욕망의 소용돌이에 갇힌 원초적 인간

2009년, 영화계를 놀래킨 박찬욱 감독의 또 하나의 파격적인 작품, 영화 <박쥐>를 기억하시나요? ’뱀파이어가 된 신부’라는 설정으로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선 이 화제작은 바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의 작품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 <박쥐>에서 신부 역으로 분한 배우 송강호가, 뱀파이어가 되어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만 했던 처연한 광경들이 사실은 인간의 본연의 모습과 본능을 기저에 두었던 것처럼, <테레즈 라캥>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기질을 그대로 작품 속에 드러낸 에밀 졸라의 첫 자연주의 작품이었습니다.

내면에 꿈틀거리는 자연성을 끄집어 낸 작가



에밀 졸라는 1840년,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나 남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에서 자랐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곤궁 속에서 살아가며 파리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온 그는, 이듬해 대학입학자격시험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시인이 되기 위한 습작을 시작하는데요. 파리의 <아셰트> 서점에 점원으로 취직한 에밀 졸라는 사실주의적인 문학 조류에 눈을 뜨면서 일을 하는 틈틈이 작품을 써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 단편집 <나농에게 주는 이야기>를 펴내며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던 에밀 졸라는, 소설과 함께 꾸준히 평론을 써오며 미술전비평으로 마네, 모네, 세잔 등 불우한 신진 인상파 청년화가들을 강력히 지지하기도 하는데요. 바로 이 무렵, 그는 자연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린 작품 <테레즈 라캥>을 세상에 발표하게 됩니다.



자연주의 문학이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된 문예사조로, 인간세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감정과 사건들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사실적인 소설들을 써오던 에밀 졸라는, 비로소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작품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요. 정신병에 걸린 ‘아델라이드 푸크’라는 여자가 ‘루공’이라는 농부와 결혼을 하고, 후에 남편 ‘루공’이 죽은 뒤 알코올 중독자인 마카르와의 사이에 자식을 갖게 됩니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그 후에 이어지는 자손들과 일가족들의 일대기를 그린 총 20권의 대작입니다. 이 20권 속에는 작품 <목로주점>과 <나나>, <제르미날> 등 에밀졸라의 대부분의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들과 <루공-마카르 총서>는 이후 20세기의 수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단편영화로 제작된 <목로주점>을 시작으로 <제르미날>, <야수 인간>, <나나> 등의 작품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을 주며 영화화되었습니다.


스크린 속에 펼쳐진 비극적 욕망의 풍경



에밀 졸라의 작품 중에서도 자연주의 문학의 시조인 작품 <테레즈 라캥>은 회화와 문학, TV와 영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다양한 작품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에밀 졸라의 작품은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묘사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요. <테레즈 라캥>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모의 손에 맡겨진 주인공 테레즈가 친척 카미유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한 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 친구인 로랑과 부정을 저지르며 끝내 남편 카미유를 죽이며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카미유를 세느강에 빠뜨리고 결혼까지 이르지만 밤마다 환영에 시달리며 황폐해져 갑니다. 에밀 졸라는 이런 특정한 환경 속에 빠진 인물들의 모습을 인간이라는 ‘동물’을 해부학자가 과학실험을 하듯 관찰하는데요. 이 파격적인 소설은 1873년 제작된 연극을 시작으로 20세기에 수많은 무대에서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테레즈 라캥>은 이탈리아 감독에 의해 무성영화로 제작됩니다. 1916년에는 미국에서 <마블 하트>라는 이름으로, 1928년에는 감독 자크 페이더에 의해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이 영화는 에밀 졸라가 작품 속에서 의도한 디테일한 환경 묘사로 관객을 몰입시킨 작품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테레즈 라캥>은 영국, 독일,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TV시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작가 제임스 M.케인이 <테레즈 라캥>에서 영감을 받아 쓴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프랑스에서 다시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테레즈 라캥> 속 욕망의 구도를 각색한 영화들이 다른 이름들로 속속 탄생합니다. 그리고 현존하는 <테레즈 라캥>의 최고의 걸작이라는 마르셀 카르네의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데요. 배경과 인물, 전개과정을 새롭게 각색해 또다른 매력을 발휘한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합니다.



한국영화 <박쥐>에서도 에밀 졸라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뱀파이어 이야기라는 판타지 속에드러난 인간적인 욕망은 자연주의 소설인 <테레즈 라캥>과 닮아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 <테레즈 라캥>은 찰리 스트레이턴 감독에 의해 또 한번 재탄생하게 됩니다. 10년 동안이나 작품을 기획해온 감독은 “열정과 위험한 집착 사이의 경계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테레즈 라캥>에 매혹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가장 잘 옮겨온 작품으로 꼽힙니다. 에밀 졸라라는 위대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작품세계를 현대의 관객들이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의 가공 없이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패셔니스타이자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배우 엘리자베스 올슨이 테레즈 역을 맡았습니다. 수많은 영화 버전의 <테레즈 라캥>이 만들어졌지만, 원작과 가장 닮아있는 작품인 만큼, 에밀 졸라가 그려낸 <테레즈 라캥>의 본연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과학적 결정론의 영향으로 인간의 본성이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에밀 졸라. 그는 <테레즈 라캥>에 “자유 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을 선택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육체와 환경에 의해 지배된 욕망이 빚어낸 살인이라는 비극적 이야기와 자극적인 소재로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누구도 쉽게 시도하지 않았던 그의 문학적 재능이 탄생시킨 위대한 작품들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영화화 되지 않은 에밀 졸라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또 어떤 감독들의 창작욕을 자극해 새로운 <테레즈 라캥>이 탄생하게 될 지 기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