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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발자크/스탕달] 프랑스 소설계의 대문호, 발자크vs스탕달

나폴레옹, 7월혁명, 계몽주의 라는 단어들로 대표되는 19세기 프랑스는 사회•정치적 격동기로, 후에 유럽을 넘어 각국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프랑스의 문학 역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로 이어지는 이 시대를 거치며 기 드 모파상, 빅토르 위고 등과 같은 유명 작가들을 낳았는데요. 이들과 같이 19세기 프랑스 소설의 두 기둥 역할을 하였던 작가 발자크와 스탕달을 통해 그들의 삶과 결부되는 문학의 세계 속으로 루이까또즈 공식 블로그 구독자 여러분들을 안내하겠습니다.

‘인간희극’ 안에 모든걸 바치다, 발자크

낭만주의를 사랑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주의적 소설로 현재까지 19세기 프랑스 대표 소설가로 칭송 받는 오노레 드 발자크는, 10대 무렵 법관이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문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대부분의 문학가들처럼 당시 유일하게 군림하던 나폴레옹을 신봉하였는데요. 발자크는 평생 ‘나폴레옹이 칼로써 이룩하지 못한 것을 펜으로 이룩하겠다’라는 염원을 품었으며, 실제로 그의 작품 여러 곳에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 있게 문학가의 길을 선택했던 그는 목표와는 다르게 하는 일마다 연이은 실패를 맛보게 되는데요. 빚쟁이가 되어 채권자들에게 쫓기면서도 작품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귀족부인과의 사랑을 전환점으로 처음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소설 '올빼미 당원'으로 인정 받기 시작합니다.

불행을 불행으로서 끝을 내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불행 앞에 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행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중략…
불행은 때때로 유일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불행을 이용할 수 있다.
                                                                                                                                                   -오노레 드 발자크-

발자크는 일생 동안 그의 나이를 훨씬 뛰어넘는 약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썼는데요. 신기한 점은 여기에 70%에 해당하는 많은 소설들이 모두 ‘인간희극’이라는 종합적 제목 안에 묶여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올빼미 당원'을 토대로 대표작 '고리오 영감' 등 모든 소설 속의 인물들이 다른 소설에 재등장하는 수법을 사용함과 동시에 2,0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을 탄생시켰는데요. ‘예술의 목적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발자크 커피와 발자크 조각상

서울 홍대 근처 뒷골목의 한 까페는 ‘무슈발자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캐나다 토론토에도 ‘발자크’라는 커피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커피 애호가로 불리던 발자크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밤낮없이 글을 썼던 그가 이 고난위도의 노동 아닌 노동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하루 50잔 이상씩 마셨던 커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요. 섬세하다 못해 세밀하게 매 작품을 써내려 갔던 그에게 커피는 실수를 줄여주는 마법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소설에서만큼은 완벽에 가까웠던 발자크의 명성은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에서도 전해집니다. 로댕은 평생 동안 발자크를 숭배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초상화, 사진 등을 모아 조각상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요. ‘그것은 내 인생의 요약이고, 내 삶 전체의 노력의 시간의 결과물이며, 내 미학적 이론의 주요한 동기이다. '발자크'를 작업하면서 난 다른사람이 되어 있었다.’라는 인상 깊은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더 밝아 진 빛, 스탕달

치밀한 심리묘사와 저항적인 성격의 소설로 유명한 스탕달은 사실, 당시 시대에는 주목 받지 못했던 소설가였습니다. 발자크와 마찬가지로 1800년 프랑스의 영웅이라 불리는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시기, 나폴레옹 제정의 관료로 원정군을 따라 알프스를 넘기도 했던, 한때 승진을 거듭하던 군인이었는데요. 이 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로 넘어간 스탕달은 본격적으로 문필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첫 소설 ‘아르망스’로 데뷔한 스탕달은 성적 불능자라는 파격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요.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적과 흑’이 발표되었을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의 재판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쓰게 되었다는 ‘적과 흑’은 ‘쥘리앵 소렐’이라는 주인공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파멸을 그려냄과 함께, 당시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소설인데요. 이탈리아에 유난히 애정이 깊었던 그의 마음을 담은 작품 ‘파르마의 수도원’ 역시 ‘적과 흑’에 비견되며, 스탕달이 세상을 떠나고 몇 십 년이 흐른 뒤 당대 최고의 소설들로 평가 받게 됩니다.

벨리즘과 스탕달 신드롬

스탕달의 본명 마리 앙리 벨(Marie Henri Beyle)에서 온 벨리슴(beylism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스탕달이 자신의 본명에서 따와 만든 단어로, 그의 인생철학관을 보여주는 단어 이기도 한데요. 프랑스어 사전에 ‘스탕달 작품의 주인공 같은 기질'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벨리슴은, 그의 모든 소설의 기반이었던 ‘행복 추구’에 대한 마음과, ‘적과 흑’에서 보여주었던 권력에 대한 숭배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스탕달을 통해 파생 된 또 하나의 단어는 스탕달 신드롬 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성당에서 화가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려던 찰나, 감동이 밀려옴과 동시에 황홀한 느낌을 경험한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적어 놓은 데서 유래했는데요. 이 현상을 처음으로 기록한 스탕달의 이름을 가져와 그대로 스탕달 신드롬으로 기록된 이 용어는, 현재에도 미술이나 문학과 같은 예술작품에 감명받은 사람들의 증상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칭찬과 함께 이어진 정

[영화로 만들어졌던 '파르마의 수도원']

19세기 문학계에서 높이 인정받던 발자크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빛을 본 스탕달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한 이야기는 두 소설가가 서로 깊게 존경했으며, 칭찬과 지적도 아끼지 않는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스탕달이 쓴 <파르마의 수도원>을 두고 무명에 가까운 작가에 불과했던 스탕달의 소설을 발자크가 ‘글마다 숭고함이 폭발하고 있다’는 극찬과 함께, 아끼지 않는 조언을 <리뷰 파리지엔>에 올리자 이를 본 스탕달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편지글을 발자크에게 보내게 됩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씨에게>

‘어젯밤에는 꽤 놀랐습니다.
잡지를 통해 그런 식으로, 더욱이 그 방면의 뛰어난 대가에 의해 비평을 받으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리의 한복판에 버려진 고아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당신에게 평범한 인사의 편지를 드리기는 정말 쉬운 일이지만, 당신의 비평하신 방법이 파격적인 점을 생각하여,
그것을 모방해서 나도 마음으로부터의 편지로써 회답하려 합니다.
찬사보다는 여러 가지 충고에 대한 나의 감사하는 마음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이하 생략)’

[스탕달이 발자크에게 보냈던 편지 일부]

이렇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넘나들며 소설가로써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온 발자크와 스탕달은 프랑스 근대소설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역사 속 유명한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자신의 라이벌이며 모토로 삼았던 인물들이 하나씩 있는 것처럼, 발자크와 스탕달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조언자이자 팬이 되어 주었는데요. 선의의 경쟁자라는 좋은 예를 보여준 두사람은 소설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현대인들에게 소설이라는 한 장르를 통해 프랑스의 역사와 자신들의 삶까지 돌아보게 하는 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