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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고갱 작품] 독보적인 예술 철학, 마침내 결실하다-폴 고갱


2012년 개봉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등장하는 고갱은 수많은 예술가가 각각의 꽃을 피우던 19세기 후반을 공허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시대로 평가하며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모습을 비칩니다. 어쩌면 고갱은 그러한 이유로 실제 삶에서 유럽이라는 현실적 공간을 탈피하여 여행과 방랑을 반복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지도 모릅니다.

불우했고, 삶의 마지막도 초라했지만, 방랑객의 삶을 통해 얻어진 화려하고 강렬한 열대 색감의 작품들은 오늘날 고갱의 명성을 존재케 합니다. 1848년 프랑스 파리 출신의 후기인상파 화가. 고집스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 고갱의 라이프스토리를 작품 속에서 만나보실까요?

고갱, 그리고 고흐


미술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고흐와 고갱의 우정은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 일화로 각인되어있는데요. 고갱에 대한 지독한 우정과 애증으로 인해 자신의 귀를 자르며 자해하기에 이르는 고흐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는 과정까지. 비극적인 결말이 불가피했으나 둘의 특별한 우정은 서로의 예술성에 큰 영향력을 미치며 진정한 예술가로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왼쪽 그림은 고흐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린 작품으로 고갱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황색 그리스도>입니다. 농촌의 수확과 결실의 과정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순환으로 해석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고갱이 고흐와 함께 브르타뉴에 거주하면서 그 지역 농민들의 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 도출된 예술적 해석으로 탄생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과 해석을 통한 작품성을 나타내어 초기작 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중요하게 거론됩니다.


문명을 떠난, 원시적 삶에 대한 동경


위의 그림은 고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신이 지켜본다>입니다. 타히티 여성의 성적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관능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한데요. 북유럽 출신의 페미니스트였던 자신의 와이프와는 정반대의 여성들로 가득했던 타히티는 계산적이지 않고 문명에서 한발 빗겨나 누리는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고갱은 프랑스인 아버지를 심장병으로 일찍 잃고 난 후 페루인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진 잉카민족성의 영향 때문인지 고갱은 어릴 적부터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사랑했고 어린 시절부터 잦은 이동과 여행을 해온 터라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모험이 가득한 곳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럽게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고갱은 인정에 인색하고 비평이 즐비한 파리에서의 삶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고갱이 생각하기에 파리는 창조적이고 개성 있는 그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기에는 너무나도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타히티라는 원시적 공간은 단순히 고갱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개념을 뛰어넘어 예술적 안식처의 역할을 띄고 있습니다.
 

죽음을 결심하며 그린 대작, 그리고 1,000프랑


고갱이 그린 그림 중 최고의 대작으로 손꼽히고 또 고갱 역시 최고라 자평했던 작품인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철학적 경지에 다다른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인간이 겪게 되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사상이 농축되어 있어서 삶에 대한 초월적 모습을 나타냅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타히티라는 공간은 독립적인 작품세계를 펼치기에 충분한 곳이었으나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고갱은 점차 문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지리멸렬함을 느끼기에 이릅니다. 이윽고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기 전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그려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금액은 고작 1,000프랑. 그것도 모두 8점의 작품을 판 품값이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고갱이 르네상스에 대한 동경의 뜻을 밝힌 대사가 실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건, 혹은 우디 앨런이 가상으로 그의 마음을 심증 하여 반영한 것이건,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개방적 풍토가 메마른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작품성에 대해 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고갱의 작품은 현재 누구나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고, 국내에서도 관람기회가 제공될 예정이라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에 이르러 고갱의 예술세계가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고갱 스스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지의 결실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