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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4세/패션/태양왕] 최초의 패셔니스타, 루이14세를 들여다 보다

“루이 14세는 놓치는 것이 없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역사적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고,
이 모두는 루이 14세가 주도한 것이다.”

프랑스의 문호 ‘볼테르’가 루이 14세를 기리며 한 말입니다. 루이까또즈가 프랑스어로 루이 14세(1638~ 1715)를 일컫는 단어라는 건 루이까또즈 공식 블로그 구독자 분들이시라면 다들 아실 텐데요. 이처럼 루이 14세는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군주 일뿐 아니라, 디자이너, 작가, 건축가 등 예술 문화에 걸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패션과 아름다움을 위해 나라를 움직였던 왕, 그리하여 자신의 나라를 전 세계에서 패션을 선두 하는 나라로 변모시킨 최초의 패셔니스타 루이 14세가 탄생시킨 스타일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유행을 창시하다

우리는 현재 유행을 구분하기 위해 이번 시즌, 지난 시즌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유행의 흐름을 구분하는 게 사용되는 ‘시즌’이란 개념이 바로 루이 14세에 의해 시작 되는데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유행이란 흐름이 바로 이 시기에 처음 탄생했단 걸 알 수 있습니다.

루이 14세의 패션 혁명이 일어나기 전 사람들의 의상은 개인 양재사나 재봉사에게 맡겼고, 원단부터 디자인까지 직접 결정해야 했기 때문에 각각의 신분에 맡게 혹은 재산에 따라 서로 다른 옷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허나 1670년대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귀부인들, 솜씨 좋은 디자이너들이 모여 새로운 패션을 도모하면서부터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귀부인들은 맞춤옷을 포기했고, 시즌을 대표하는 대표 스타일 ‘룩’이 먼저 등장을 했으며, 디자이너들은 적당한 가격의 비슷한 옷들을 출시해 매장에서 판매함으로써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 또한 유행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이에 귀족과 대중 모두에게 인기를 얻는 거물급 디자이너가 탄생, 고급 의류를 창조하고 제작하는 그들을 일컫는 ‘쿠튀리에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습니다. 추후 이 단어는 그 유명한 ‘오뜨 쿠튀르’의 어원이 되죠.

이렇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유행이란 개념이 생겨나자 거기에 따른 다양한 패션 관련 산업들이 붐이 일어나기 시작, 유행을 전파시키고자 지금의 마네킹의 기원인 패션인형이 탄생 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행을 접할 수 있도록 유명인을 모델로한 패션판화가 제작되어 퍼져나감으로써 이는 패션 모델과 패션 잡지, 광고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실제 당대 최고의 남녀 모델은 메이이 백작부인과 전쟁영웅 장 바르트였는데요. 메이이 백작부인은 루이 14세의 실질적인 후처 마담 드 맹트농의 사촌으로 베르사유 궁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며, 1696년 최신 남성복 모델로 등장한 장 바르트는 대연합전쟁에서 큰 족적을 남긴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이렇게 현대의 패션 업계의 거의 대부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온 루이 14세의 시대, 이러한 시대를 거쳐 프랑스는 유행이 시작 되는 곳, 패션의 메카가 되어 전 세계 남녀노소의 눈길을 사로 잡기 시작했습니다.


슈즈 매니아의 원조

현대의 여성들이 패션을 논할 때 옷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가방과 슈즈인데요, 루이 14세가 최초의 슈즈 매니아였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실제 태양왕 루이 14세는 ‘오트 펌프스(haute pumps, 수제화)’에 열광, 이에 제화공이란 직업이 생겨났고 제화업계가 대변혁을 거치게 됩니다. 루이 14세에게 아름다운 슈즈를 선물, 왕의 마음 속 든 전설 속의 제화공 레스타주의 등장으로 프랑스의 신발 업계는 붐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레스타주는 귀족으로 신분까지 상승하게 되는데요. 이렇게 루이 14세가 신발에 집착했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각선미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자신의 다리를 더욱 예뻐 보일 수 있는 신발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후대의 사람들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슈즈에 대한 그의 열망은 그의 초상화만 봐도 느낄 수 있는데요. 다리를 드러내고 발끝에 힘을 줘 구두가 여실히 드러나는 그의 초상화 들은 왠지 자신의 구두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실 루이 14세의 집권 이전에는 남성들은 무릎 위까지 오는 긴 부츠로 다리를 가렸는데요.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승마나 사냥을 할 때만 부츠를 신도록 제안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본인 직접 발레리노가 되어 춤을 추며 다양하고 럭셔리한 구두들을 선보였다고 하네요.

<루이 프렌치>

하이힐을 즐겨 신었던 루이 14세는 디테일마저 놓치지 않았습니다. 구두에는 다양한 장식들로 화려해졌으며 굽에도 매우 신경을 써 곡선미가 우아한 루이 힐(루이 프렌치, 뒷굽이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밑창이 굽에서부터 아치를 지나서 앞부분까지 이어진 굽)을 만들어내었고, 재임 말기 하이힐에 정교한 그림을 그녀 넣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실내에서 신던 뮬(뒤싸개가 없는 신발)을 밖에서 신을 수 있는 신발로 만들면서 프랑스 혁명 전까지 뮬의 황금기를 이루어내죠. 이렇듯 왕의 다리를 예뻐 보일 수 있는 원초적인 본능에 이끌려 탄생한 프랑스 슈즈의 발전, 루이 14세가 없었더라면 ‘섹스 앤더 시티’의 캐리가 마놀로 블라닉에 열광하고 지미 추를 탐닉하는 ‘슈즈홀릭’ 이 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아한 핑크 빛 뮬로 연인을 유혹하는 그림 속 귀부인은 뮬을 섹시한 신발로 묘사, 프라고나르의 '그네'세부 모습, 1760년대 작>

1676년 여름, 루이 14세는 센 강을 품위 있게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비싼 백조 수백 마리를 수입,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가는 길목을 풀어놓을 정도로 그의 유일한 관심사인 멋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이 세기의 가장 화려한 궁 베르사유를 탄생시켰으며, 헤어드레서와 스타일리스트란 직업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이야기 꽃을 피워내는 카페 문화를 창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전 세계에서 아직도 통용되는 프렌치 시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가 없었으면 루이까또즈도 없었겠죠.

프랑스 왕정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함과 동시에 최초이자 가장 민감했던 패셔니스타 루이 14세. 정권 말에는 강력한 왕권도 화려했던 문화 예술도, 그리고 굳건하던 그의 정신마저도 피폐해진 채 어두운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라는 그의 말처럼 지금까지 가장 선명히 남는 시대 중에 하나 임은 분명합니다. 루이까또즈에서도 그의 화려했던 열정과 패션과 문화에 대한 애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거듭나고 노력하는 브랜드가 되겠습니다.

참고문헌] 스타일 나다-조안 드잔